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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연구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⑤ 1980년 봄과 1987년 민주항쟁

·민주 계열 정당사 - ⑤ 1980년 봄과 1987년 민주항쟁 

 

 

 

'서울의 봄'과 야권 분열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피살됨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최 권한대행은 11월 8일 기존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자녀 임기를 채우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한다는 정치 일정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12월 6일 통일 주최 국민회의에서 대통령 보궐 선거를 실시한 결과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규하는 취임사를 통해 1년 안에 헌법 개정을 실현하고, 그 뒤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유신 체제 종식과 친 정부 출범을 향한 정치 일정이 시작되었다. 

 

 

가택연금 해제일의 김대중

 

 


 12월 8일자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모든 정치 관련 구속자들이 석방되었다. 12일에는 김영삼 총재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취하되어 신민당은 다시 김영삼 체제로 복귀했다. 신민당과 공화당은 국회 내에 헌법개정심의 특별위원회를 여야 동수로 구성하여 개헌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한편 제야 지도자 김대중도 12월 12일 가택연금이 해제되어 제야 세력을 중심으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1980년 2월 29일에는 김대중 윤보선 등 687명에 대한 복권 조치가 단행되었다. 국회에서의 개헌 논의도 2월 하순 본 궤도에 올라 개헌 특위에서 대통령 직선을 기본으로 하는 헌법안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이처럼 1980년 서울의 몸은 외견상 민주정부의 성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 했지만 정국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일명 안개정국이었다. 그 원인은 당시의 정치 상황이 이중 권력이 존재하는 이중의 정치 과정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 정부가 정치 일정을 관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의 권력은 이미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장악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유신 체제 연장을 향한 움직임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12.12 쿠데타 성공 기념 활영

 

 

 


10·26 이후 등장한 일명 신군부는 모두 박정희 정권 하에 군부의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이었다. 이들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육군 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체포함으로써 군권을 장악했다. 당시 국내 정치 집단들은 12·12 사태의 중대성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12·12 다음 날 남한은 사실상 쿠데타가 벌려진 상황이다. 


유약한 문민정부가 명목상으로 존재하지만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신군부 집단의 치밀한 계획 하에 완전히 장악되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후 신군부는 일명 케이 킹 공작을 시작으로 집권 시나리오를 진행했다. 과도 정부의 일정을 늦춰 잡음으로써 정치 일정을 모호하게 몰아갔다. 


 4월 14일에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고 나섬으로써 정권 찬탈 음모가 가시화되었다. 신군부는 북한 남침설을 유포하여 안보 위기를 조장하는 등 군부 개입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부 보수 언론은 이에 적극 동조했다. 민주정부 수립의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전두환의 권력 찬탈 음모가 가시화되자 시민사회의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그 중심은 대학이었다. 3월 개학과 함께 각 대학마다 학생회가 부활했고 초기 학내 민주화에 집중했던 학생 시위는 점차 정치투쟁으로 전환되었다. 5월 13일부터 가두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서울에서만 14일 7만 명, 15일 10만 명의 대학생들이 신군부와 최규화 정부를 비난하고 비상계엄 체제와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정국은 초긴장 상태에 빠져들었고, 경찰력이 한계에 이르자 군부가 개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확산되었다. 군부 쿠데타의 위험을 감지한 대학생들은 15일 밤 자진 해산 일명 서울역 해군을 결정했다. 당시 야당과 재야를 대표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16일 공동 발표를 통해 대학생들의 자제를 요구하는 한편 정치적 혼란의 원인은 최규화 정부가 권력 연장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비상계엄 즉시 해제, 정부 중심의 개헌 구상 철회, 국회 개헌안 수용, 민주정부 수립을 연내에 마무리하는 정치 일정 발표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이미 5월 초순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국보위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신군부는 학생 시위를 구실로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 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정치활동 금지 대학교 휴교령 언론 보도 사전 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5월 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점령한 뒤 무력으로 봉쇄했다. 

 


김대중과 김종필을 포함한 학생 정치인 재야 인사 2천699명이 체포되었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 역시 가택 연금되었다.
1961년 5월 16일에 1961년 516에 이어 또 한 번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5·16이 시대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시민들에 의해 불가피하게 묵인 수용되었다면 5·17은 그 어떤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왔던 현장입니다. 그리고 저항의 무대가 유신체제 하에서 가장 심하게 탄압받았던 정치지도자의 지역 근거지인 광주 전남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최초 발단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교문 앞 시위였다. 공수부대의 학교 점령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이에 공분한 일반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했고, 시민과 학생들은 도청 앞으로 몰려가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김대중 석방하라, 휴교령 철회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후 목숨을 건 전 시민적 저항에 밀린 계엄군이 22일부터 25일까지 일시 철수하기도 했지만, 지역적 고립 속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결국 군부 내에서 전두환에 가장 충성했던 공수부대에 의해 27일 잔혹하게 진압되어 막을 내리게 된다.

 

 

 

광주 운전사들의 금남로 시위


1979년 10.26에서 1980년 5.17에 이르는 '서울의 봄'이 결국 신군부의 권력 장악으로 귀결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신군부의 치밀한 준비도 한 요인이겠지만, 박정희의 피살에도 불구하고 유신 체제의 핵심 권력 기구나 집단들은 여전히 건재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민주화 세력은 취약했다. 서울의 봄 당시 일반 시민의 지지는 미미했고, 5.17 쿠데타에 대한 저항은 지역적으로 고립되었다. 민주화 운동의 지도부는 분열되었다. 1980년 봄에 재야의 연대 조직인 국민연합은 신민당 주도의 제도적 개혁을 지지하는 온건파와, 대중 동원을 통한 민주화를 주장하는 강경파로 분열되었다.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야당의 분열이다. 당시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영삼은 신민당 중심론을 내세우면서 김대중의 입당을 촉구했다. 김대중은 재야인사뿐만 아니라 통일당까지 통합하는 범야 연합을 주장했다. 양측의 대립 속에서 결국 김대중은 4월 7일 신민당 입당을 포기했고, 김대중을 추종하는 신민당 의원들은 신당 결성 준비에 나섰다. 박정희에 저항하여 단결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10.26 이후 분열했고, 이것이 신군부의 집권을 용이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5공 초기의 위성 야당

 



 5.17 이후 이른바 '5공화국'이 성립되는 과정은 5.16 이후 '3공화국'이 수립되는 과정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군부의 직접 통치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는 각종 '개혁 조치'를 단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군부 집권에 필요한 헌법과 정당을 조직하는 등의 사전 작업을 마친 뒤에, 최종적으로 대선·총선을 통해 집권에 이르는 과정이 그것이다.

 먼저 신군부는 5월 31일 국보위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신군부 정권 출범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른바 '개혁 작업'(과외 금지, 언론 통폐합, 삼청교육대 등)을 진행했다. 국보위 주도로 단임제와 간선제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이 마련되어, 10월 22일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신군부 세력이 실권을 장악하는 여당으로 민주정의당이 조직되었고, 이어 신군부가 용인한 인사들로 준여당 성격의 야당인 민한당, 국민당 등이 결성되었다.

사전 작업이 완료되자, 1981년 2월 제12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11일 대통령선거인단 선출에 이어, 25일 5,271명으로 구성된 대통령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전체 유효 투표의 90.2%를 얻은 전두환이 당선되었다. 뒤이어 3월 25일 제11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민정당은 전체 의석 276석 중 151석을 확보했다. 야당인 민한당이 81석, 국민당 25석, 그 밖에 민권당과 신정당, 민사당, 민주농민당, 안민당 등이 한두 의석을 얻었다. 흥미로운 것은 전략 지역을 설정해 혁신계 후보의 당선을 유도했다는 점이다. 5공 초기 정당들이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위성 정당이었음을 반증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신군부는 유신헌법의 여러 독소 조항을 폐지하는 동시에, 대통령 선거에 정당 간 경쟁을 허용하고 인위적으로 다당 체제를 만들어 냄으로써, 제5공화국이 최소한의 민주적 외양을 갖추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제5공화국의 본질은 군부 권위주의 체제였고 사실상 유신 체제의 연장이었다. 국가권력의 핵심은 신군부가 장악하고 있었고, 안기부와 경찰 등의 억압적 국가기구가 언론·학교·재야·노동계 등 시민사회 전역을 철저히 통제하는 체제였다.

 정당정치의 측면에서 볼 때, 제5공화국은 정당 간 경쟁을 통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사실상 봉쇄한 체제였다. 5공 헌법은 대통령 간선제를 택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선출하던 유신헌법을 답습했다. 차이가 있다면 선거인단의 정당 가입과 정당 추천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보 기구나 경찰 등에 의한 사찰과 압력이 상시적인 권위주의 체제에서, 선거인이 노출되는 간선제란 사실상 비밀. 자유투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신군부는 제12대 대선 당시, 대통령 선거인단에 출마한 야당 후보의 등록을 봉쇄하거나 이미 등록한 후보에게 압력을 가해 사퇴하게 만드는 등의 공작을 노골적으로 자행한 바 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유신 시대와 동일한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중선거구제를 채택하여 여당 의원의 당선을 용이하게 했고, 전국구 의석의 배분 역시 제1당에게 무조건 3분의 2를 배정하도록 했다.

 결국 5공 체제하에서도 야당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 권력이나 의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제도적으로 봉쇄된 것이다. 따라서 5공 체제하에서도, 야당은 유신 체제하에서와 같은 선택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5공 체제 내의 야당으로 안주하면서 군부 권위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장식물로 전락할 것인가, 5공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 민주화 운동 세력과 연합할 것인가의 선택이 그것이다.

 신군부가 주조해 낸 제11대 국회의 야당은 전자의 전형적인 예였다. 민주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야당의 출현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1985년 신한민주당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그 계기는 1983년 말 찾아온 이른바 '유화 국면'이었다.

 

 

 

 



민주화 투쟁의 중심: 신한민주당과 통일민주당

 

 

 


 집권 초기 철권통치를 유지했던 전두환 정권은 1983년부터 대학 자율화 조치 및 정치 피규제자 해금 등 일련의 자유화 조치를 취했다. 전두환 정권이 유화 조치를 취한 것은,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위한 명분을 쌓고, 1985년 초로 다가온 총선에 대비해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권의 의도와 달리, 자유화 조치는 학생·재야 운동, 노동운동 등 시민사회의 부활을 가져왔고,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민주화 운동 세력의 도전이 본격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중 하나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의 결성이었다.

1985년, 4년 4개월 만에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김영삼 씨와 김대중 씨가 포옹하고 있는 장면 (오른쪽부터 김상현, 김영삼, 김대중, 이희호 )


 전두환 정권은 1983년 2월 1차 해금에 이어, 1984년 2월과 11월에 각각 2, 3차 해금을 단행하는데, 민추협은 이런 정세의 변화 속에서 추진되었다. 특히 민추협의 결성은 1980년 봄에 분열했던 야당의 두 핵심 세력, 즉 김영삼 계와 김대중 계의 재결합을 의미하는데, 그 계기는 김영삼이 1983년 봄 민주화 5개항을 놓고 벌인 23일간의 단식 농성이었다. 단식 농성에 대해 김대중이 연대의사를 표했고, 이후 양김은 8.15 공동성명을 통해 1980년 봄 당시의 분열에 대해 사과하고 민주화를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할 것을 다짐했다.

 그 결실로 1984년 5월 18일,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는 광주민주항쟁 4주년을 즈음하여 민추협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민추협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공동 의장(김대중 의장을 대리하여 김상현)으로 하여, 운영위를 포함한 모든 조직을 양 세력이 50대 50의 비율로 분점하는 식으로 결성되었다. 민추협은 5월 18일 민주화 투쟁 선언을 통해 ‘군부의 복귀와 시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 등을 다짐했다.

 민추협은 12월 11일, 김영삼·김대중·김상현 3인의 이름으로 1985년 총선 참여 및 신당 창당을 공식 발표했다. 이후 1985년 1월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권의 의도와 달리, 자유화 조치는 학생·재야 운동, 노동운동 등 시민사회의 부활을 가져왔고,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민주화 운동 세력의 도전이 본격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중 하나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의 결성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3년 2월 1차 해금에 이어, 1984년 2월과 11월에 각각 2, 3차 해금을 단행하는데, 민추협은 이런 정세의 변화 속에서 추진되었다. 특히 민추협의 결성은 1980년 봄에 분열했던 야당의 두 핵심 세력, 즉 김영삼 계와 김대중 계의 재결합을 의미하는데, 그 계기는 김영삼이 1983년 봄 민주화 5개항을 놓고 벌인 23일간의 단식 농성이었다. 단식 농성에 대해 김대중이 연대의사를 표했고, 이후 양김은 8.15 공동성명을 통해 1980년 봄 당시의 분열에 대해 사과하고 민주화를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할 것을 다짐했다.

그 결실로 1984년 5월 18일,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는 광주민주항쟁 4주년을 즈음하여 민추협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민추협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공동 의장(김대중 의장을 대리하여 김상현)으로 하여, 운영위를 포함한 모든 조직을 양 세력이 50대 50의 비율로 분점하는 식으로 결성되었다. 민추협은 5월 18일 민주화 투쟁 선언을 통해 ‘군부의 복귀와 시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 등을 다짐했다.

민추협은 12월 11일, 김영삼·김대중·김상현 3인의 이름으로 1985년 총선 참여 및 신당 창당을 공식 발표했다. 이후 1985년 1월1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데, 신당의 약칭인 '신민당'은 유신체제에 맞서 싸웠던 신민당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총선을 불과 나흘 앞둔 2월 8일 김대중이 미국에서 귀국함으로써 신당의 열풍은 더욱 거세졌다. 2월 12일 개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게 된다. 2.12 총선의 투표율은 84.6%를 기록했는데, 5.16 이래 가장 높은 투표율이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높은 투표율과 선명 야당에 대한 지지로 표출된 것이다.

 더욱이 여론의 압력에 밀려 민한당 의원 30명을 비롯한 야권의원들이 속속 입당함으로써 신민당은 국회 의석의 3분의 1이 넘는 103석을 확보하게 된다. 단독으로 국회 소집이 가능한 거대 야당으로 급부상한 것이며, 정당 경쟁은 다시 양당구도로 전환되었다.

 신민당의 전략은 '개헌을 통한 정권 교체'에 맞추어졌다. 제12대 국회가 개원되자 이민우 총재는 대표 연설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국회 안에서의 개헌 요구가 여당의 거부로 무산되자, 신민당은 1986년 2월 12일 민추협과 함께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의 추진을 선언했다. 민추협과 신민당은 3월 1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 개헌 추진 시도 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을 개최했다. 시도 지부 결성 대회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수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여 가두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3월 17일에는 개헌 서명운동을 위한 재야 세력과의 연대 기구로서 민주화를 위한 국민 연락 기구가 결성되었다.

개헌 압력이 고조되자, 전두환은 4월 30일 야당에게 개헌 협상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여야는 6월 국회에 '헌법 개정 특위'를 구성하고, 회의를 거듭했지만 합의에 이를 수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이 아니면 대통령 간선제의 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개헌 특위는 파행을 거듭했고, 국회는 공전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1986년 말 이른바 '이민우 구상' 이라는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12월 24일 이민우 총재가, '김대중 복권 등 7개항이 수용되면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독자 구상을 밝힌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 당론에 반하는 것이었지만 일부 비주류측은 내각제를 지지하고 나섰다.

 직선제 쟁취를 향한 전열이 와해될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 1987년 3월 12일 상도동·동교동계 의원들은 '당내 불순 세력'과의 결별을 위해 새로운 선명 야당을 창당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78명이 탈당하여 5월 1일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할 선명 야당이 새롭게 출발했음을 선언했다.

 야당 내 타협 세력이 소멸되고 선명 야당의 전열이 재정비되자,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이른바 '4.13 호헌 조치'로 맞섰다. 개헌 논의를 올림픽 이후로 연기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대선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정국은 집권 세력과 야당 강경파가 전면 대치하는 양상으로 정리되었다.

‘4.13 호헌 조치’로 노골화된 군부독재 연장 음모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주화 운동 세력의 대단결이 요구되었다. 이를 위해 통일민주당과 재야 운동권은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학생 및 재야운동권과 야당이, '직선제 개헌, 군사정권 퇴진, 비폭력 민주화 투쟁'이라는 최소 목표에합의함으로써, 최대 세력이 참여할 수 있는 '최대 민주화 연합'을결성한 것이다. 다른 한편, 5월 22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폭로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1987년 1월 14일)의 진실은, 일반시민들의 참여를 촉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군부독재 정권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정면충돌한 6월 항쟁의 무대는 이렇게 마련되었다. 결전의 날은 6월 10일이었다. 이날 민정당은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를 개최하여 노태우를 차기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같은 시각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군 고문 살인 은폐 조작 및 호헌 철폐 규탄 국민대회'를 열었다. 대학생들은 각 대학에서 출정식을 갖고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도심으로 몰려나왔다.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 당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도식
피 흘리는 이한열 열사


 6월 항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6월 9일 경찰의 직격탄을 맞고쓰러진 연세대 이한열 군이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운동본부는 18일 대대적인 최루탄 추방 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전국 14개 도시에서 2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민주헌법 쟁취 국민 평화 대행진'을 펼친 26일에는 전국 33개 시 4개 군에서 180만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더 이상 물리력으로 누를 수 없는 단계에 이르자,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8개항으로 된 시국수습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일명 '6.29 선언'이었다. 그 내용은 직선제 개헌,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 복권, 언론 자유 최대보장, 기본권 신장, 지방자치, 대학 자율화, 정당 활동 자유 보장 등이었다. 6월 항쟁의 성과로 직선제 개헌 요구가 관철된 것이다.

 

 

1987년 6월 29일 동아일보 기사 - 노대표, 직선개헌 선언

 


 하지만 흔히 생각하듯, 6.29 선언이 군부 세력의 항복과 민주화 세력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집권 세력이 권력으로부터 퇴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선거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로의 복귀'를 약속했을 뿐이고, 더욱이 현직의 이점을 누리면서 선거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이 점에서 6.29 선언은 군부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타협이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12월 대선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다.

 6.29 선언 이후 민주화 이슈는 개헌과 대통령 선거로 이동했다. 개헌 협상은, 민주화의 주역인 학생·재야 운동권을 배제한 채, 국회에서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두 제도권 정당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양측이 타협한 핵심 내용은,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후보의 국내 거주 기간에 관한 조항 삭제, 기존의 20세로 선거권 연령 유지 등이었다. 10월 22일 여야 합의로 헌법 개정안이 마련되어,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