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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연구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⑥ 정권 교체 실패와 민주세력의 분열 ·재편

민주 계열 정당사 - ⑥ 정권 교체 실패와 민주세력의 분열 · 재편

 

 

야권 분열과 대선 패배 :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6.29선언 직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의 회동

 

 


  6·29 조치에 따라 전두환은 7월 10일 김대중에 대해 사면 복권 조치를 단행했다. 그리고 8월 8일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1972년 유신 조치로 당원 자격을 잃은 지 15년 만에 정당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의 입당을 계기로 민주당은 대선 후보를 둘러싼 권력 경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단결했던 민추협의 두 공동의장이 다시 경쟁 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김영삼 측은 당내 주도권을 배경으로 대통령 후보의 조기 공천을 주장한 반면, 당내 기반이 약한 김대중은 후보 확정을 최대한 늦출 것과 함께 재야 민주 인사를 영입해 범야 단일 후보를 선출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의 대립 속에서 10월 10일 김영삼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10월 28일 김대중도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 내에서 후보 단일화가 성사될 가능성은 없었고 결국 양 김 씨는 분당의 길로 나서게 된다. 

 

 김대중 진영은 신당 명칭을 평화민주당으로 정하고, 11월 12일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김대중을 총재 겸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김대중 진영은 야당 단일 후보는 아니지만 재야 민주세력이 지지하는 유일한 후보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통일민주당도 11월 9일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 공식 지명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김영삼 후보 선거벽보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평화민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거 홍보물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은 야권의 분열 뿐만 아니라 민주화 세력 전체의 분열을 초래했다. 민주화 세력은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 그룹,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는 후보 단일화 그룹, 독자 후보 그룹 등으로 분열되었다. 독자 후보로 나온 민중당의 백기완 후보가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사퇴함에 따라, 12월 16일 제13대 대선은 결국 '1노3김'의 대결로 치러졌다. 선거는 총 유효표의 36.3%를 얻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기결되었다. 김영삼 후보 28% 김대중 후보 27.1%를 합하면 민주화 세력은 유효 투표의 55%를 얻고도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한 것이다. 야권 분열이 군정 연장의 기회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대선 패배 직후 양 김은 대선을 '원칙적인 부정 선거'로 규정하고 선거 무효와 투쟁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여론의 비판이 이어지자 김영삼은 12월 19일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각성한 야권은 제13대 총선에 대비해 통합을 다시 모색했다. 하지만 선거구제를 둘러싼 입장 차이와 통합신당의 대표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결국 통합은 무산되었다.

 

 그 결과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역시 야권 분열 상태에서 치러졌다. 선거 결과는 민정당 125석,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 한계레 민주당 1석,  무소속9석 등으로 나타났다.

 

제13대 총선은 주목할 만한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 선거였다. 
첫째는 의정 사상 최초로 집권당이 원내 의석의 과반수에 미달하는 여소야대 국회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둘째는 지역 정당 체제의 체제의 등장이었다. 경북·경남의 민정당, 호남의 평민당, 부산·경남의 민주당, 충청의 공화당 등 각기 지역 기반을 달리하는 4개의 정당이 등장한 것이다.


셋째는 민주화 운동 진영이 독자정당으로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재야운동권 인사들 중 상당수가 야당에 참여하는 식으로 원내에 진출했다. 재야 인사들은 특히 평민당에 많이 참여했다. 운동권 재야 인사들의 참여를 계기로 야당은 자유주의 정당이 머물렀던 당의 이념적 지평을 진보 개혁적 내용까지 포괄하는 쪽으로 확대하게 된다. 

 

 

 


야권 대분열: 3당 합당 대 평화민주당

 

 

노태우 정부에서도 권력의 핵심은 5공 시기와 다르지 않았다. 사실상 군부 집권의 연장이었고, 보수 지배의 구조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민주화 이후 수립된 정부였기에, 민주주의 제도의 작동을 무력화할 수는 없었다. 
1987년 헌법에 따라 국회의 기능이 정상화·강화되었고,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당 정치 역시 활성화되었다. 특히 민주화 이후 정치사회적 개혁에 대한 각계 각층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보수 지배 질서에 대한 학생 노동 재야 운동권의 도전도 계속되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5공 청산 및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노동운동도 활성화되었고, 노조 조직률은 19.8%까지 상승했다.
이를 바탕으로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 쟁해도 급증했다. 대학 및 재야 운동권은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나아갔다. 이런 움직임은 보수 지배 계층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에게 더욱 위협이 된 것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시민사회와 운동권의 요구가 의회 내로 수렴하여 입법화의 문턱까지 나아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제13대 국회 전반기 여소야대 상황에서 민주당과 평민당은 구체제 청산과 각종 개혁 요구를 적극적으로 대변했던 것이다. 


먼저 양당은 5공 청산과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국민적 요구를 적극 대변했다. 물론 12·12와 5.·17의 진상 규명, 광주 학살의 책임자 처벌 등 핵심 이슈가 전혀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는 분명했다. 하지만 5공의 각종 비리가 폭로되어 핵심 인물들에 대한 사법 처리가 이루어지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5공 청산 못지않게 민주당과 평민당이 주력한 것은 각 부분의 개혁 작업이었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만들어진 각종 악법을 개폐하는 작업이 야당의 주도하에 추진되어 사회안전법 사보호법 집시법 등이 개정 또는 폐지되었다. 야당은 또한 과거 권위주의 통치의 핵심 수단이었던 억압적 국가기구의 민주적 개혁을 추진했다.이를 위해 안기부법 개정, 국가보안법 개정, 경찰 중립화법 제정 등을 추진했다. 사회경제적 분야에서는 전교조 합법화, 노동관계법 개정 등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6공 초기의 민주화 운동권을 중심으로 급진적 개혁 요구가 분출하고 있었고, 이는 여소야대라는 조건에서 야당을 통해 의회 내로 투입되어 입법화 직전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보수지배 질서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수세에 몰린 보수 지배 세력은 1989년 중반부터 반격에 나서게 된다. 공안 정국과 3당 합당을 통해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양쪽에서 힘의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1월 22일 3당 합당 발표

 

 1990년 1월 22일 민정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3인이 발표한 3당 합당은 이런 배경 위에서 이루어졌다. 합당의 주역인 민정당으로서는 여소야대 상황을 타개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고, 같은 보수세력인 공화당이 이에 합류한 것은 합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김영삼이 참여한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차적으로 그것은 권력욕 혹은 권력 의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제2야당으로서는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다. 야권의 입장에서 볼 때 3당 합당이란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야권의 한 축을 담당했던 집단이 민주-반민주 대립 축을 넘어서서 구권위주의 집권 세력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수차례 연대와 분열을 되풀이해 온 바 있다. 하지만 그런 분열은 항상 야권 내에 머물렀었다. 
이런 점에서 3당 합당이란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열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분열이 가능했는가? 그것은 먼저 그동안 양김의 연대를 촉진했던 반독재 민주화라는 목표가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일정 부분 해소된 데 따른 것이었다. 김영삼은 '5공 청산이 일단락된 이상 미래를 내다보는 정계 대개편이 필요하다'고 합당의 이유를 밝혔는데, 그에게 민주화란 군부의 퇴진을 의미했던 것이다. 나아가 민주화 이후 양김이 분열한 것은 그들을 근본적으로 갈라놓는 보다 중대한 요인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국 정치에서 이념 문제에 해당하는 남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3당 합당 이전, 제13대 국회 전반기에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은 모든 개혁 의제에서 연합을 형성하고 개혁 작업을 추구했었다. 이를 해체시킨 결정적 계기는 1989년 봄의 급진적 반미·통일운동과 밀입국 사태에 이은 공안 정국의 도래였다. 특히 6월에 발생한 서경원 의원 밀입국 사건이 결정적 계기였다. 서경원 사건에서 공안 당국은 김대중 총재 등을 국가보안법상 불고지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기에 이르는데, 민주당은 이를 비판하기보다 공안 당국의 색깔 공세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결국 1989년 공안정국이 몰고 온 일련의 사태는 야권 연대의 파열과 평민당의 고립을 초래했고, 그 연장선에서 3당 합당이 이루어진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냉전 반공체제에 대한 도전이 강화되자, 야권은 보수적 야당과 개혁적 야당으로 분열되었고 전자가 보수 지배 집단과 결합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이다.


 더욱 주목할 것은 평민당의 이런 이념적 고립화가 지역적 고립화와 결합되어 이뤄졌다는 것이다. 3당 합당은 곧 호남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박정희-전두환 군부 독재 하에서 보수 세력에 의한 이념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정치적 비토 대상이 비토 대상이었다. 3당 합당은 그런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1987년 총선과 대선을 치르면서
대선을 거치면 드러난 지역 균열과 중복되어 나타났다.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호남과 급진 개혁세력을 배제한 채로 보수 세력이 야권 내의 보수적 부분을 흡수 통합하여, 보수 지배 블록을 강화한 것이 3당 합당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신민주연합당과 민주당 

 

 1990년 2월 9일 3당 합당의 결과물인 민주 자유당이 정식 출범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개혁 세력과 보수세력의 힘 관계는
역전되었다. 우선 국회는 여소야대에서 여대야소로 급변했다. 그 결과 국회에서 야권이 추진했던 개혁 작업은 전면 중단되었다. 전반기에 기본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던 법안까지도 공권력을 다시 강화하는 쪽으로 재개정되었다.
보수 지배 세력에 도전하는 재야 학생운동권과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다시 폭력적 탄압이 가해졌다. 

 


 이런 상황의 급변은 야권과 민주화 진영의 심각한 위기를 불러왔다. 당장 시급한 과제는 3당 합당으로 등장한 거대 여당에 맞서기 위해 야권을 확대 재편하는 일이었다.

 

 먼저 평민당은 외환 확대 및 당세 확장을 위해 제야와의 통합을 모색했다. 그 결과 평민당은 학계, 노동계, 종교계, 여성계, 문화예술계, 청년학생, 사회운동, 농민운동, 전 정치인 등 5천여 명의 민주인사들을 대거 영입하여 1991년 4월 9일 제야와
통합 야당인 신민주연합당(신민당)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한편 3당 합당을 비판하면서 민주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통일민주당 소속 이기택·노무현·김정길 의원 등과 무소속 의원들은 6월 15일 민주당을 창당했다. 현역 의원 8명에 불과한 소규모였기 때문에 흔히 꼬마 민주당이라고 불린다.

 

 

 

(사진 왼쪽부터)김정길, 노무현, 이기택, 강창성 의원 (민주당 창당 (일명 꼬마 민주당))

 

 


1991년 6월 20일 민주화 이후 첫 지방자치 선거가 지방의원 선거에 한해 부분적으로 실시되었다.  이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1990년 10월 13일 10월에 13일간의 단식 투쟁 끝에 쟁취한 소중한 성과물이었다. 하지만 선거에서 야권이 얻은 성 대표는 초라했다. 지자체 선거의 패배는 야권 통합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당통합을 선언한 뒤 활짝 웃는 얼굴로 포옹하는 신민당 김대중 총재와 민주당 이기택 총재


3당 통합으로 등장한 거대 여당 앞에서 공멸의 위기감에 처한 야권은 결국 1991년 9월 16일 신민당과 꼬마민주당을 통합하여 민주당으로 재출범했다. 민주당은 김대중과 이기택 전 공동대표 체제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이로써 제13대 총선 결과 형성된 4당 체제는 다시 민자당과 민주당의 양당 구도로 돌아갔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선 출마를 목표로 1992년 2월 8일 통일국민당을 창당함에 따라 3월 24일 제14대 총선은 3당 대결 구도로 치러지게 되었다. 

 


선거전에서 민주당은 "날치기 당한 여소야대 총선으로 되찾자", "통합 야당 밀어주기 일당 독주 막아내자" 등의 구호를 통해 3당 야합에 대한 국민의 심판과 거대 야당의 반민주·반민생 독주에 대한 견제를 호소했다. 특히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 온 청년·학생·노동운동 지도자 20여 명 등을 20여 명을 공천하여 개혁 정당으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 정규 육사 출신의 군 핵심 인사 5명이 창군 이래 처음으로 민주당에 입당하여 야당의 영역을 크게 넓히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민자당 참패, 민주당 승리, 국민의당 약진으로 나타났다. 민자당은 과반에서 한 상 모자란 149석을 얻는 데 그쳤다. 3당 합당 당시 국회의원 3분의 2를 초과했던 규모에서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으로 축소된 것이며, 13대 총선에 이어 두 번째 여소야대의 등장이었다. 민주당은 호남에서의 압승은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선전(44석 중 25석)하고 중부권에서도 13석을 확보하여 총 97석을 차지했다.

 


제14대 총선 이후 정국의 초점은 12월 대선에 맞춰졌다. 민주당은 김대중과 이기택 간의 대선 후보 경선을 거쳐 5월 26일 김대중을 후보로 확정했다. 김대중 후보는 반독재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투사로서의 강경 이미지를 벗기 위해 '뉴DJ플랜'을 추구하면서 대선 공약 및 정책 개발에 힘을 쏟았다. 

 


 12월 18일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 간의 대결로 치러졌는데 결과는 총 투표 42%를 얻은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의 당선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33.8% 득표에 그쳐 또 한 번 대선 도전에 실패했다. 대선 과정에서 민자당 측은 김대중 후보에 대한 용공 음해를 자행하고 이선실 간첩단 사건 등 공안 사건을 선거에 이용했다. 특히 선거 종반에 터진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은 대선 막판 변수로 떠올랐다. 투표를 일주일 남긴 12월 11일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부산 초원복집에 모여 김영삼의 당선을 위해 대책 회의를 가졌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관권 개입과 지역 감정을 조장하는 부정불법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언론은 사건의 본질보다 국민당 측의 불법 도청에 초점을 맞추어 여론을 호도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지역 감정을 조장하여 여권에 유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김대중 정계 복귀와 새 정치 국민회의 

 

 

 

대선에서 패한 김대중 후보는 12월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1월 26일 영국으로 출국했다. 대선 패배와 김대중 대표의 정계 은퇴 선언은 민주당을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김영삼 정부 초기의 개혁 드라이브 속에서 정부 여당의 인기가 치솟자 상대적으로 야당의 존재감은 상실되어 갔다. 

 

 

 

 

민주당은 위기 극복과 조직 정비를 위한 전당대회를 3월 11일에 개최하여 이기택을 민주당 대표로 선출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구민주계와 신민계 간의 파벌 다툼이 이어졌고, 주류·비주류 간의 대여 투쟁과 시국 간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4월 보궐선거 참패 8월 보궐선거 패배 등으로 민주당의 침체가 이어졌다. 리더십 부재와 그로 인한 침체는 김대중의 정계 복귀를 촉진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 직접적 계기는 1995년 6월 27일 지방선거였다. 영국에 머물던 김대중은 1993년 7월 귀국한 이래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을 아태재단을 설립하여 통일문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지방선거를 맞아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지원 유세에 나서게 되었고 이것이 본격적인 정계 복귀의 징검다리가 된 것이다. 6·27 지방선거는 단체장 선거까지 포함했기에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선거였을 뿐만 아니라 김영삼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 선거였다. 
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참패 민주당의 부상이었다. 

 

민주당은 15개 광역단체장 중에서 서울시장을 포함해 4명을 당선시켰고 민주당이 5명 자민련이 4명, 특히 서울에서는 구청장 25명 중에 23명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지방선거 승리를 이끈 김대중은 7월 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김대중은 기자회견에서 정계 은퇴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사과하면서 국가적 위기와 야당의 기능 마비를 바로잡는 데 조그마한 힘이 나마 보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정계 복귀의 이유를 밝혔다. 또한 민주당 개혁으로는 야당의 구조적 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당 창당이 불가피함을 역설했다. 


그 결과 김대중이 이끄는 새로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9월 5일 출범했다. 창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김대중은 국민회의 창당이 1996년과 1997년의 승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치임을 역설했다. 민주당은 의원 65명이 국민회의로 이탈함으로써 의원 39명의 소규모 정당으로 축소되었다. 이로써 야권은 다시 새정치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분열되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창당 7개월 만인 1996년 4월 11일 제15대 총선을 맡게 되었다. 선거 결과는 신한국당 139석 새정치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 민주당 15석 등으로 나타났다 국민회의는 지방선거 승리와 김대중 정부 실정의 기대여 원내 100석을 목표로 설정했지만 79석에 얻는 데 그쳤다. 민주당과의 분열이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1997년 대선 승리 

 

 

 

제15대 총선 이후 국민회의의 목표는 1997년 말 대선 승리를 통한 정권 교체에 맞추어졌다. 이를 위한 대선 전략은 크게 두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첫째는 중도 혹은 보수까지 포용할 수 있게 당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3당 통합에서 보수 세력은 민주개혁 세력을 이념적 지역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고 이는 야권이 해결해야 할 근본 과제가 되었다. 제14대 대선에서 뉴DJ플랜은 그런 시도의 일환이었지만 충분하지 못했었다. 좀 더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했고 김대중은 그것을 김종필과의 연대 DJP 연대에서 찾고자 했다. DJP 연대는 이념적 지역적 고립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자민당과의 공조 체제는 김영삼 정권에 맞서는 야권 연대에서 시작되었다. 4·11 총선 직후 정부 여당이 야 여소야대 극복을 위해 야당 당선자 영입을 추진하자 양당은 5월 26일 보라매 공원에서 4·11 총선 미니 수호 결의대회라는 이름으로 공동 장외 집회를 개최했다. 이를 계기로 두 총재는 연대를 구축해 나가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대선을 1년여 앞둔 1996년 11월부터 후보 단일화 논의를 시작했다. 1년여의 단일화 협상 결과 1997년 10월 31일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대선 후보를 김대중으로 단일화하는 대신 집권하면 양당의 공동정부를 구성해 총리는 자민련이 맡기로 하고 1996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DJP 연합… 한배 탄 김종필·김대중·박태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11월 4일에는 박태준이 DJP 연합에 합류함으로써 보수로서의 외연 확대가 가속화되었다. 다른 한편 분열된 야권 및 민주화 세력을 다시 통합하기 위해 민주당 세력과의 연대가 추진되었다. 민주당은 국민회의가 창당되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411 총선에서도 참패했다. 이렇게 되자 당내 비주류 측은 국민통합추진위원회 송출을 결성하여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핵심 구성원 대부분이 김대중 후보의 요청에 부응해 국민회의에 참여한 것이다. 

 


DJP 연대가 보수적 유권자 쪽으로 외연을 확대한 것이라면 통추의 합류는 개혁 성향 유권자들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선은 국민회의의 김대중 신한국당의 이회창 그리고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국민신당으로 출마한 이인재 간의 3자 대결 구도로 치러졌다. 김대중 후보는 평화적 정권 교체를 구호로 내세웠고 특히 준비된 대통령론을 펴면서 자신만이 IMF 외환위기라는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유권자들을 설득했다. 


개표 결과 김대중 후보가 유효투표 40.3%를 얻어 38.7% 획득에 그친 이회창 후보를 39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1998년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