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계열 정당사 ③ 군부 쿠데타와 민정 회복 투쟁
5·16과 3공 초기 : 민정당과 민주당
1961년 5·16 군부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침묵과 방관'이었다. 민주정부를 무력으로 타도한 데 대한 시민들의 저항은 사실상 전무했다. 학생이나 지식인들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면 정부의 무능이 자초한 결과였다.
쿠데타 세력은 '반공 태세 재정비, 부패와 구악 일소, 민생고 해결과 자주 경제 재건' 등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출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후에도 군부는 여러 차례 민정 이양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민정이란 '군복을 벗은 군부의 통치'에 불과했다. 이를 위해 군부 세력은 치밀한 준비를 진행했다.
먼저 군부는 정치 활동 정화법을 통해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활동을 전면 동결시킨 상태에서, 집권에 필요한 제도적 기반을 구축해 갔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헌법을 제정하여 1962년 12월 17일에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강력한 대통령중심제 헌법이었다. 정당 설립 요건 및 정당 활동 규제를 강화하는 정당법도 제정했다. 특히 소선구제와 전국구 의원을 결합한 선거법을 제정했는데, 이에 따르면 제1당 득표율이 50% 미만일 경우 제1당의 전국구 의석의 2분의 1을 배분하도록 했다. 여당이 다수 의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편법이었다.
다른 한편 군부는 중앙정보부 주도로 공화당 사전 조직 작업을 진행했다. 전국적인 득표 동원 조직이었다. 그리고 1963년 8월 31일 박정희를 당 총재로 선임함과 동시에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군부 집권을 위한 사전 작업이 일단락되자 1963년 1월부터 민간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이 허가되었다. 이에 따라 야당 조직의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야권은 범야 세력의 대동 단결을 목표로 단일 정당 결성을 시도했지만 성사에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독자 정당을 조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민주당 구파 쪽에서는 5월 14일 민정당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김병로를 대표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신파 쪽에서도 7월 18일 박순찬을 총재로 하여 민주당을 창당했다.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제5대 대선은 군부 통치의 시작이냐 민정으로의 복귀냐를 결정하는 분기점이었다. 대결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로 좁혀졌다. 선거전에서 윤보선은 군정의 실정을 비판하는 데 집중했지만 막판에 박정희 후보의 사상 문제를 제기했다. 여순 사건과 관련한 관련된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한 것이다. 일종의 색깔 공세였다. 공화당은 이를 역이용하여 사상 논쟁이 과거 선량한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치던 한민당의 매카시즘적 수법을 되풀이하는 소행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나아가 박정희는 윤보선을 귀족, 자신을 서민으로 부각하면서, '구악세력 대 민중 세력'으로 선거 구도를 몰아갔다. 선거 결과, 박정희 후보가 470만 표를 얻어 455만 표 득표에 그친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곧이어 11월 26일 제6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공화당은 자금이나 조직력에서 야당을 압도했다. 야권은 민정당, 민주당, 국민의당, 자유민주당 등으로 분열되어 공멸을 자초했다. 제1당의 압도적으로 유리한 선거법도 공화당 압승의 원인이 되었다. 공화당은 33.5%를 득표해 전체 의석 175석의 63%에 이르는 110석을 휩쓸어 갔다. 이에 반해 민정당은 41석 민주당은 13석에 그쳤다.
민중당과 신한당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이른바 '제3공화국'의 막이 올랐다. 박정희 정권의 독주를 막기 위한 야권의 1차적 과제는 야권 통합이었다. 이를 위해 야권은 통합과 분열을 반복한 끝에 1967년 통합 야당 신민당을 출범시킴으로써 본격적인 전열을 갖추게 된다.
야권 통합의 첫 번째 계기는 한일 회담 저지 투쟁이었다. 박정희 정권 초기의 최대 역점 사업은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명분은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본 유치였다. 이미 1962년 11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간의 밀실 합의 (이른바 '김종필 - 오히라 메모')를 통해 청구권 문제의 합의를 본 박정희는 취임 직후인 1964년 봄부터 본격적인 한일 회담에 돌입했다.
야당을 비롯한 시민사회세력들은 3월 6일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출범시키고 한일 회담 반대 투쟁에 나섰다. 4.19 이후 최대의 학생 시위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일어났고,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6·3 사태)
다른 한편 효과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위해 야권 통합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국민의당이 민주당에 합류하고 자민당이 민정당이 합류하는 방식으로 야권은 일단 민주당과 민정당으로 모아졌고, 최종적으로 양당은 1965년 6월 14일 민중당으로 결합했다.
야권과 시민 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 협정은 1965년 6월 22일 양국 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마지막 관문은 국회 비준이었다. 민중당은 국회 비준 저지 전략을 둘러싸고 다시 강온 양파로 분열되었다. 당 대표 박순천이 이끄는 온건파는 원내 투쟁을 주장한 반면, 윤보선이 이끄는 강경파는 '복수 정당을 규정한 헌법에 의해 야당이 없는 국회 비준은 무효가 될 것'이라는 논리 하에 의원직 총사퇴와 당 해체를 주장했다.
한일 협정 비준안이 결국 8월 14일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지도부의 온건 노선에 반발한 당내 강경파들은 집단 탈당하여 1966년 3월 30일 신한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건 신한당은 윤보선을 총재로 추대하는 동시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민주당과 민정당이 민중당으로 통합했다가 다시 민중당과 신한당으로 분할하는 과정은 대정부 투쟁 전략과 지도 노선의 차이가 그 명분이기는 했지만,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갈등이 재현된 것이기도 했다.
단일 야당 신민당
1967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야당 통합에 대한 여론의 압력이 다시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양당은 대통령 후보는 윤보선이, 대표 위원은 유진호가 맡기로 하고 1967년 2월 7일 신민당으로 다시 모이게 된다. 이로써 1979년까지 박정희 독재에 맞설 단일 야당의 대우가 형성되었다.
1967년 5월 3일 대선에서,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는 1963년에 이어 다시 한 번 박정희에 맞섰다. 윤보선 후보는 산업화의 부작용을 부각시키면서 민주적 헌정질서의 회복을 외쳤다. 박정희는 이에 맞서 경제 개발의 성과를 내세웠다. 투표 결과 박정희 51 4% 윤보선 41%로 박정희 후보가 116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관권과 금권을 동원한 부정 선거에 힘입은 바 컸지만, 여당이 압도적 표차로 승리한 배경에는 경제 성장의 효과에 대한 국민들의 인정도 있었다.
대선 패배에 이어 신민당은 1967년 6월 8일 총선에서도 참패했다. 여당은 경제 발전을 야당은 민주주의를 각각 내세웠는데, 선거 결과 공화당은 총 175석 중 7 129석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개헌선을 훨씬 상위하는 의석이었다. 신민당은 45석에 그쳤다. 여당의 압도적 승리는 야당 참관인 태장 공개 투표 공무원 투입 등 엄청난 규모의 금권·관권이 동원된 부정 선거의 결과였다. 선거 직후 신민당은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당론으로 정하고 등원 거부라는 강경 투쟁에 나섰다. 결국 공화당 스스로 부정 선거를 자인하고, 8명의 당선자를 제명하는 조치 등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거 이후 5개월간에 걸친 협상 끝에 제7대 국회는 개헌할 수 있었다.
1967년 총선을 통해 여당이 의도한 바는 결국 3선 개헌 시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69년 초부터 공화당은 3선 개헌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근대화와 민족 중흥을 위한 강력한 리더십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였다. 야당의 반대와 학생들의 반대 데모는 물론이고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 (이른바 4·8 항명 사건)이 일었다. 박정희는 7월 25일 특별 담화를 통해 개헌 문제를 신임과 결부할 것임을 밝혔다.
대통령의 세 번 연임을 허용하는 3선 개헌안이 8월 5일 국회에 제출되었고, 9월 13일 국회 본회의에 의해 회부되었다. 신민당 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자, 본회의장을 빠져나온 공화당 의원들은 9월 14일 새벽 2시에 국회 의사당 건너편에 있는 국회 제3별관에 특별 회의실에 모여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효상 국회의장은 의사봉이 미처 준비되지 않아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쳐 통과를 선언했다. 대통령 장기 집권을 위해 3선 금지 조항을 무력화시켰던 '4사5입' 개헌이 15년 만에 재현된 것이다.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7월7일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져서 찬성 65% 반대 31%로 확정되었다. 3선 개헌은 박정희 군부 정권이 민주주의의 제도적 허울을 벗어던지고 강성 권위주의 체제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40대 기수론과 1971년 대선
3선 개헌 이후 정국의 초점은 1971년 대선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신민당은 리더십 부재의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67년 대선 패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윤보선은 당 고문으로 정치 일선에 후퇴해 있었고,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이끌었던 유준호 총재는 신병 치료 차 일본으로 떠난 상태였다. 1970년 1월 26일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이 당수로 선출되었지만 국민적 지도자로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참여하의 투쟁' '대화 정치'를 내건 유진산의 온건 노선은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당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부 세대 교체론이 당 안팎에서 제기되었다. 그 선봉에 선 것은 김영삼이었다. 1969년 11월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표방하면서 대선 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당의 원로와 중진들은 냉소적 반응을 보였지만, 같은 40대인 김대중과 이철승이 가세함으로써 세대교체론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결국 1970년 9월 29일 대선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는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세 후보 간의 경쟁으로 압축되었고,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김대중 후보가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대선전에서 김대중 후보는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살겠다 갈아보자"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는 선거 구호로 큰 바람을 일으켰다. 특히 김대중이 제시한 정책들은 박정희식 국가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서 큰 방향을 일으켰다. 그 핵심은 특정 소수에게 집중된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민 대중을 위한 경제체제 구축을 골자로 하는 대중경제론과 미일 중소 등 4대 강국이 한반도에서 전쟁 억제를 공동으로 보장토록 하는 '4대국 안전보장론'이었다. 성장 일변도의 균형 발전 모델과 냉전적 안보 모델에 대한 대안적 국가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박정희의 대응은 색깔론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예비군 폐지는 김일성의 남친을 촉진하는 이적행위라는 시기였다.
선거 막바지에 쟁점이 된 것은 총통제 이슈였다. 김대중 후보는 박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고 읍소했다. 4월 27일 선거 결과는 박정희 후보 634만여 표 김대중 후보 539만여 표로 나타났다 표차는 94만여 표였다. 곧이어 치러진 5월 25일 제8대 총선은 유신 체제 성립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선거였다. 선거 결과는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으로 나타났는데 신민당은 7대 국회에 비해 의석을 2배로 늘렸고 서울 대구 부산을 비롯한 32개 도시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국민들은 1967년 선거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 성과를 인정했지만, 1971년 선거에서는 민주주의 파괴 행위에 대한 비판 의사를 표출한 것이다. 특히 신민당이 개헌 저지선을 20석이나 상회하는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박정희로서는 쿠데타를 제외하면 더 이상 집권이 불가능함을 확인한 선거가 되었다.



'한국 정치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⑥ 정권 교체 실패와 민주세력의 분열 ·재편 (0) | 2022.10.12 |
|---|---|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⑤ 1980년 봄과 1987년 민주항쟁 (0) | 2022.10.12 |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④ 유신 체재하 반독재 민주화 운동 (0) | 2022.10.04 |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② 4·19와 최초의 민주당 정부 (0) | 2022.09.24 |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 1955년 민주당 창당 (0) | 2022.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