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계열 정당사 - ⓛ 1955년 민주당 창당
반독재 민주정당의 기원
민주주의의 초기 제도화와 침식
1948년 5월 10일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최초의 보통·평등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신생 정부는, 국민주권과 보편적 인권, 입헌주으의와 법치주의, 삼권불립, 보통·평등선거와 복수 정당 간의 경쟁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법적·제도적 기반을 거의 완벽히 갖추고서 출범했다.
하지만 정부 수립 과정은 냉전의 도래와 극단적인 좌우 대립으로 말미암아 두 개의 적대적인 정부가 남북에 각각 수립되는 민족 분단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남에는 냉전 반공체제가 북에는 공산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런 시대적 악조건은 민주주의의 작동을 억압하는 여러 부정적 제약 조건을 우리에게 부과했다.
다른 한편, 1948년 이전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실천해 본 경험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자유민주주의의 제도는 도입되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사회정치적 기반이나 세력은 아직 확보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부 수립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침식과 훼손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민주주의의 사인적 독재 체제로 변질되었고, 이후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 독재 하에서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부정당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향유하기까지는, 1987년 민주화에 이르는 근 40년간의 민주화 투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주당 계열 정당은 이런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 시원은 이승만 독재 정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승만 정권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훼손했다. 그 첫 사례는 정부 수립 이후 채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발생한 반민특위 사건이었다. 제헌국회가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반민특위를 구성하여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을 시작하자, 이승만이 자신의 권력 기반인 경찰·관료를 보호하고자 1949년 6월 경찰력을 동원해 반민 특위를 무력으로 진압·해산해 버린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은 제2대 국회에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재헌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1952년 대선을 앞두고서 이승만은 반대 세력이 우세한 의회를 통해서는 재선을 보장할 수 없는 딜레마를 딜레마에 직면했다. 궁지에 몰린 이승만은 계엄령 하에서 의원들을 연행해 이틀간이나 감금 압박한 끝에 직선제의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7월 4일 길의 표결을 통해 강행 통과시켰다.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독재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권력력은 재선으로 충족될 수 없었다. 영구 집권을 위해 다시금 헌법 개정을 시도한 것이다. 4사5입 개헌이 그것이고, 이에 저항하여 조직된 것이 1955년 민주당이었다.
민주당 창당과 반독재 투쟁
민주당 창당의 배경은 1954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총선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선거 결과, 여당인 자유당은 114석을 확보한 데 반해, 야당인 민국당은 15석밖에 얻지 못했다. 경찰 및 관료 조직이 총동원된 대규모 관권 개입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자유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무소속 의원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개헌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 의도는 1954년 9월에 제출된 개헌안을 통해 드러났다 개헌안의 핵심 내용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 규정의 적용을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개헌안은 국회에서 11월 27일 표결에 붙여졌는데 재적 203명에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 등으로 개헌 정족수에 1명이 부족했다. 사회를 보던 국회 부의장은 부결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틀 뒤 자유당은 다시 국회를 열어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개헌 정족수인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3...인데 이를 반올림하면 135명이 되므로 27일 표결이 의결 정족수를 충족한다는 논리였다. 이른바 '4사 5입 개헌'으로 불리는 이날의 날치기 개헌은 정부 수립과 함께 도입된 민주주의가 독재와 권위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분기점이었다.
이승만의 영구 집권 시도는 반자유당 세력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반 자유당 세력은 이승만에 맞서 헌법을 지키기 위해 1954년 11월 30일 호헌동지회를 결성하고 이를 모체로 신당 결성에 나섰다.
신당 창당 과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참여 의사를 밝힌 조봉암을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신당 추진세력은 이 문제를 두고 보수 성향의 자유 민주파와 혁신 성향의 민주대동파로 양분되었다. 이를 모체로 신당 결성에 나섰다.신익희, 조병옥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민주파는 조봉암을 배제하고 보수 우익 진영으로만 신당을 결성할 것을 주장한 반면, 민주대동파는 반독재 투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대大야당을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자유민주파는 민주대동파를 배제한 채 독자적으로 창당을 추진하여 1955년 9월 19일 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민주당으로 결집한 세력은, 한민당으로부터 내려온 민국당 계열과 장면·정의령 등의 흥사단계, 자유당 탈당 인사, 기타 무소속 인사 등이었는데, 크게 보면 민국당 계열과 비민국당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이후 전자는 구파, 후자는 신파로 불리며 민주당의 양대 파벌을 이루게 된다. 민주당은 정강에서 "반독재 민주주의, 자유 선거에 의한 대의 정치와 내각 책임제 구현"을 내세웠다.
민주당 창당은 한국 정당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승만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이승만 세력의 구심점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이후 민주당 계승 정당은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 체제 하에서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1987년까지 이어지는 정치 대결 구도가 이때 형성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1955년 민주당을 자신의 역사적 뿌리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둘째, 민주당 창당으로 단일 야당이 형성되었지만, 그것이 국민들에게 다양한 선택의 폭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단일 야당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조봉암으로 대표되는 진보 세력이 배제된 결과였다. 만일 민주대동파의 주장처럼 진보 세력을 포함하는 식으로 민주당이 개선되었더라면 야당의 이념적 폭은 훨씬 확대되었을 것이고 그만큼 국민의 선택 폭도 확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진보 세력을 배제한 채 결성되었고, 그 결과 보수 이념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자유당 - 민주당의 양당 체제는 '보수 양당 체제' 였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정치적 이념의 선택의 폭은 그 만큼 좁아진 것이다. 민주당이 갖는 이런 한계는 반독재 투쟁을 거치면서 점차 극복되어 갔다. 냉전적 보수 정당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추구하는 자유주의 정당으로, 나아가 1987년 이후에는 진보 개혁적 내용까지 포괄하는 정당으로 변신해 간 것이다.
한편, 반이승만 세력이 결집한 민주당의 최우선 과제는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종시키는 것이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 부통령 선거는 그 첫 도전이었다.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의 신익희 부통령 후보의 장면을 지명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민주당의 선거 공모는 민심의 폭발적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 유권자가 70만 명 정도였던 시절에 신익희 후보의 한강 백사장 유세에 30만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하지만 신익희 후보가 유세를 위해 호남으로 가던 중에 기차 안에서 갑작스럽게 뇌일혈로 사망하는 바람에 정권 교체의 꿈은 좌절되었다. 다만,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 후보가 자유당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가시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총선에서도 자유당에 대한 민심 이반은 뚜렷이 드러났다. 자유당은 막대한 공권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의석에서 10여 석이 줄어든 126석을 얻는 데 그쳤다. 민주당은 47석에서 79석으로 의석을 크게 늘렸는데, 특히 서울과 부산을 비롯하여 대구 인천 광주 전주 등 도시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1960년에 치러진 제4대 정 부통령 선거는 '3·15' 부정선거로 익히 알려져 있다. 민주당은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하지만 조병옥 후보가 신병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급서하는 바람에 선거의 초점은 부통령 선거로 모아지게 된다. 이승만은 벌써 이승만은 당시 벌써 86세의 고령이었다. 자유당은 차기 임기 중에 이승만이 사망할지도 모르고 그럴 경우 헌법에 따라 양당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자유당은 차기 임기 중에 이승만이 사망할지도 모르고 그럴 경우 헌법에 따라 야당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당은 승산이 없는 이기붕 후보를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사상 유례 없는 부정 선거를 자행하게 된다. 4할 사전투표 경찰 감시하의 3인조 9인조 투표 민주당 참관인 투출 대류 투표 개표 부종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국민 주권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닐 수 없었고, 결국 419라는 전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출처 : 더불어민주주의 (더불어민주당 당원 교육 교과서)

죽산 조봉암

장면

'한국 정치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⑥ 정권 교체 실패와 민주세력의 분열 ·재편 (0) | 2022.10.12 |
|---|---|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⑤ 1980년 봄과 1987년 민주항쟁 (0) | 2022.10.12 |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④ 유신 체재하 반독재 민주화 운동 (0) | 2022.10.04 |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③ 군부 쿠데타와 민정 회복 투쟁 (0) | 2022.09.26 |
|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② 4·19와 최초의 민주당 정부 (0) | 2022.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