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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연구

[한국정치사] 민주 계열 정당사 ④ 유신 체재하 반독재 민주화 운동

민주 계열 정당사 - ④ 유신 체재하 반독재 민주화 운동

 

 

10월 유신과 야당의 선택

 

1980년 10월 17일 유신 헌법 공포식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경고한 '종신 총통제'는 10월 유신으로 현실화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헌정을 전면 중단시키면서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새 헌법을 제정할 것임을 밝혔다. 5·16에 이은 또 한 번의 쿠데타 ('친위 쿠데타')였다. 11월 29일 계엄령 하에서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유신 헌법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 23일 대의원 2,359명의 찬성 중 2,357표, 무효표 2표로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인 독재를 제도화한 유신 체제는 이승만 독재나 3공의 군부 지배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였다.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제도적으로 봉쇄된 체제였기 때문이다. 정당은 통일 주최 국민회의 선거에 참여할 수 없기에 대선에 관여할 수 없었다. 대통령이 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하는 유정회의 존재로 말미암아, 야당이 의회 수장이 되어 의회 권력을 장악하는 것 역시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제 야당은 자신들의 존재 의미와 관련된 근본적인 선택에 직면했다. 정당의 목적은 집권 여당이 되어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과 정책을 실현하는 데 있다. 야당일 경우에는 정권 교체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국민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정당이 민주주의의 엔진이라는 본래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유신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반체제 정당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야당은 독재 정권의 장식물에 불과하게 된다. 유신 체제 하에서 야당은 2인 선거구제 하에서 동반 당선이라는 당근에 만족하면서 만년 야당의 위치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유신 체제 타도를 위해 거리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느냐라는 선택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신 체제화 야당의 역사는 체제 수능에서 반체제 투쟁으로 나아가는 역사로 정리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1970년 1월 전당대회에서 유진산 체제가 성립되었지만, 당내에서는 주류의 실용주의 노선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로 인해 주류와 비주류 간 극심한 내용이 발생했고 각각 따로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한 당에 두 명의 당수가 법통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까지 벌이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유신을 맞았고 당은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신 체제 성립 이후 정치 활동이 재개되자, 소성건이 취하되면서 유진산은 당수로 복귀했고, 1973년 5월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다시 추대되었다. 유진산 총재는 '참여하의 부정' 노선을 추구할 것임을 밝혔다. 여당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6월 21일 청와대에서 여야 영수회담을 여야 영수회담이 열렸다. 회담 이후 윤보선이 유진산을 두고 '사쿠라'라고 비판하면서 일명 '사쿠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진상이 내세운 '참여하의 부정'은 사실상 '체제 협조 및 순응'이었던 것이다.


 신민당이 이처럼 체제 순응에 빠진 상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은 시민사회로부터 시작되었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10월과 11월에 최초의 유신 반대 집단 시위가 대학가에서 터져 나왔다 제야 인사들은 12월 13일 개헌 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유신 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유진산 총재는 1974년 1월 기자회견에서 유신 헌법 개헌을 위한 투쟁을 당의 당면 목표로 설정하고 개헌 추진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4월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되자 다시 움츠러들었다. 정부가 재야 인사들과 학생들을 학생을 무더기로 검거해 들였지만 신민당의 대응은 '국회 소집'을 요구하는 것이 전부였다. 


당의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 계기는 유진산 총재가 신병으로 4월 28일 타계함으로써 찾아왔다 이에 따라 차기 당권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점부터 야당의 당권 경쟁은 반유신 투쟁 방법을 둘러싼 노선 대결의 성격을 띠게 된다. 

 


반유신 민주화 투쟁의 중심: 신민당 

 

 

 

1974년 8월 22일 23일 전당대회는 '참여하의 점진적 개혁' (이철승) 이라는 유진산 노선의 계승파와, '정권을 쟁취하려는 의지가 없이는 진정한 야당 당수일 수 없다'  (김영삼)는 개혁파 간의 대결이 되었다. 의원들은 거의 현상 유지 편에 섰지만, 지방 대의원들은 의원들과 중앙 당료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결과는 후자의 지지에 힘입은 김영삼의 승리였다. 김영삼의 당선은 선명 야당에 대한 국민과 당원의 열망의 반영이었다. 전당대회 당시 가택의 연금 중이었던 김대중은 동교동계를 통해 김영삼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당내에서는 경쟁자이지만 박정희 독재 정권 타도 앞에서는 뜻을 같이 했던 것이다.

 

 김영삼 체제의 출범과 신민당의 개헌 투쟁도 본격화되었다. 신민당은 10월 21일 국회에서 헌법 개정 기초심의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제출하고 당 내에 개헌 추진위원회를 신설했다. 원내 투쟁이 벽에 부딪히자 11월 장외 투쟁에 들어갔으며, 태평로 국회 의사당에서 안국동 당사까지 가두 시위를 벌이다 가로막히자 국회 농성에 돌입했다. 중앙당에 개헌 추진본부를 설치하고 각 시도 지부별 현판식을 거행하는 방식으로 개헌 투쟁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다른 한편 1974년 12월에 지식인·종교인·구정치인 등의 연대기구로서 '민주 회복 국민회의'가 결성되자, 김영삼 총재도 이에 가담했다. 시민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야당이 참여하는 반독재 민주화 연합의 전형이 형성된 것이다. 


 고조되던 반유신 투쟁의 열기는 1975년 들어 급격히 악화된다. 4월 17일에 크메르(현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고, 30일에는 베트남마저 북부 공산군에 함락됨으로써 아시아 지역의 안보 위기가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방공 단체들의 안보 궐기대회가 줄을 이었고, 이를 이용해 정부는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시민당의 개헌 현판식은 보류되었고, 국회에서는 만장일치로 '국가 안보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5월 21일에는 여야 영수회담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김영삼은 유신 체제의 전면 반대에서 체제 내 비판으로 선회했다. 


 다른 한편 김영삼의 강경 노선에 대한 당내 비주류의 반발도 끊이지 않았다. 개헌 투쟁은 아무런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영수회담 이후에는 선명성 논란까지 제기되었다. '김옥선 파동'이 발생하자, 반대파들은 이를 선명 노선의 한계라고 몰아붙였다. 반유신 투쟁 전략을 둘러싼 당내의 대립은 1976년 5월 개최된 전당대회에서 폭력 사태로까지 비화되었다. 비주류 측이 폭력을 동원해 대회장을 점거하고 독자적으로 대회를 치른 것인데, 그 배후에는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이 있었다. 이에 맞서 주류 측도 별도 대회를 개최하여 김영삼을 다시 총재로 선출했다. 당이 분열될 수 있는 위기에서 양파는 결국 전당대회를 다시 열기로 합의했고 9월 15일 개최된 수습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이 대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유정회와 공화당은 성명을 내어 이 총재의 당선을 축하하고 또 환영했다. 


 이철승은 새로운 지도 노선으로 '중도 통합론'을 세우면서' 참여하의 개혁'을 표방했다. 외교·안보 문제에 관해 정부와 보조를 같이 하면서 보수 반공 노선을 강화했고, 일체의 원외 투쟁을 지향하고 원내 활동에 치중했다.


반유신 투쟁에서 신민당을 이탈했지만 재야 학생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 1977년 3월 22일 윤보선 함석헌 등 재야 지도자 시비는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민주국우 헌장을 발표했고, 1978년 7월 5일에는 '민주주의 국민연합'이 결성되어 반정부 활동의 연대기구로 나섰다. 이를 통해 서울 지역에서 유신 선포 후 처음으로 대중 시위가 벌어졌다.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숨죽인 정황은 12월 12일 제10대 총선에서 표출되었다. 선거 결과 신민당은 의석수에서는 공화당이 뒤졌지만, 득표율에서는 32.8%를 기록해 공화당의 31.7%보다 1.1%포인트 앞선 것이었다.

 
 재야의 저항과 제 10대 총선 결과가 신민당 내 체제 저항 세력을 공모하는 분위기에서,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기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중도 통합론, 참여하의 개혁'을 강조한 이철승과 '민주 회복, 야당성 회복'을 기치로 내건 김영삼의 대결은, 박정희 정권과 민주 정권 간의 대리 전격 대리전적 성격을 띠었다. 이철승을 돕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이에 맞서 제야 지도자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은 공개적으로 김영삼을 지지했다. 특히 김대중은 자신의 추종 그룹인 조윤형·김재광·박영록 등에게 경선 참여 포기를 종용했고, 전당대회 전날 김영삼 지지세력 단합 대회에 참석하여 김영삼 지지를 역설하기도 했다. 이철승과 김영삼의 대결은 결국 김영삼의 역전승으로 마감되었다. 

1979년 5·30 전당대회 당시 김영삼 의원과 이기택 의원이 마포 당사 밖에 모인 시민, 당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김영삼 체제 출범 이후 열린 첫 국회에서 신민당은 헌법 관계 특위 구성을 요구했고, 안건 상정이 가로막히자 거리로 나섰다. 야당과 정부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 시민사회의 반체제 저항에 야당을 연루시키게 되는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YH 사건'이 그것이다. 신민당은 YH 사건을 정치 테러로 규정하고 관계 장관 문책 등을 요구하는 농성에 돌입했다.

 

1979년 YH여공사건 당시 신민당사에서 밤샘 농성후 당사를 나서는 모습

 


YH 사태의 여진이 가시지 않은 9월 초, 유신 이후 가장 과격한 대정부 투쟁을 촉발하는 사건이 발발했다. 박정희 정부의 사주를 받은 3명의 원외 지구당 위원장이 8월 13일 김영삼 총재를 비롯한 총재단 전원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었는데 9월 8일 서울민사지법이 이를 받아들여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김영삼은 박 정권 타도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총재 집과 국회에 그대로 두어서는 정국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9월 15일 김영삼이 미국 「뉴욕타임즈」 기자와 가진 인터뷰는 그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소수 독재자인 박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카터 행정부에 요구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이를 '사대주의' , '반국가적 언동'이라고 규정하고, 의원직 박탈 징계안을 10월 4일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김영삼 제명 파동은 김영삼의 지역 거점인 부산·마산에서 유신 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을 촉발시키는 촉발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시위는 10월 15일 부산대에서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민주 선언문이 배포되면서 시작되었다. 16일부터는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도심 시위로 번졌고 18일부터는 마산 창원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10월 16일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20일에는 마산·창원에도 위수령을 발동했다. '부마 민주 항쟁'은 결국 집권 세력 내부의 분열을 촉발하여 10·26 사건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로써 박정희 독재는 18년 만에 비극적 종말을 고하게 된다.